양정51회 정기총회와 송년모임이 2010년 12월 15일 장충동 소재 자유센터에서 열렸다. 예년의 모임과 달리 회의형식을 갖추어 순국선열과 천안함 피폭 희생자에 대한 묵념이 있었고 이어서 애국가를 경건하게 부른 뒤 회의를 진행하였다. 국가의 영토가 공격을 당하고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에서도 안보의식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적 혼란 속에서 우리만이라도 마음을 가다듬고 다짐하자는 몸부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지켜왔고, 무엇을 다짐하였는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다. 역사는 지나간 세월의 나열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디딤돌이라는 어느 역사학자의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고 있다.
<돌아가는 삼각지>로 유명한 배호의 히트 곡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통하여 장충단 공원은 우리에게 애수에 젖은 낭만적인 장소로 알려졌다. 그러나 장충단(獎忠壇)이 우리 민족의 한(恨)과 아픔을 같이 한 역사적 공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장충단비 전면에 새겨진 ‘獎忠壇’이라는 글자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순종이 직접 쓴 글씨이고, 장충단 공원에 있던 활터 석호정(石虎亭)의 현판은 석정(石丁) 안종원(安鍾元) 선생님이 쓴 글씨로 우리 양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 더욱 드물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양정의숙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수집한 장충단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조선시대에는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남산계곡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근처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자 고종황제는 1900년 9월 을미사변 때 일본인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순사(殉死)한 시위대(侍衛隊)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1895)과 궁내부(宮內府) 대신 이경직(李耕稙, 1841∼1895)을 비롯한 여러 장졸의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사당을 건립하여 장충단(獎忠壇)이라 명명하였다. 1900년 11월에 세워 진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碑)로서 전면은 황태자의 예필(睿筆)이며, 뒷면에 새긴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이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짓고 비문을 썼다. “-전략-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계속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킴이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성대하다." 고종황제의 뜻에 따라 매년 봄.가을에 제사가 열렸고 이때에는 군악대가 조곡을 연주하고 예포를 쏘아 격식을 갖추었다. 후에는 임오군란 때 왕실을 호위하다 순직한 사람들의 영혼도 장충단에 모심으로써 조선황실의 공식 국립묘지로 사용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하자 일제는 조선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장충단을 폐쇄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일제는 이곳 일대에 대대적으로 벚꽃을 심는 등 일본식 정원으로 꾸며 ‘장충단공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는 상해사변(上海事變) 때 일본군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肉彈三勇士)의 동상을 세웠고,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의해 사살된 이등박문(伊藤博文)의 혼을 달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를 세웠다. 박문사의 건물은 경복궁의 예원전 및 부속건물을 이축한 것이고 입구의 문은 옛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 세운 것이었다. 조선의 민족정기를 송두리째 없애 버리려는 일제의 간교한 만행이었다. 193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차남 안준생이 상해로부터 일시 귀국하였다. 이를 알아챈 일제는 조선의 민족정신을 와해시키려는 각본을 연출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과 이등박문의 아들 이또 분기찌(伊藤文吉)가 이등박문 사망 30주년을 맞이하여 이등박문의 혼을 기리는 박문사에서 두 사람의 혼백을 화해시키는 공양을 하도록 꾸몄다. 친일 일간지 경성일보는 “아버지가 범한 죄 때문에 고투(苦鬪)의 30년을 보냈던 안준생 군이 생애의 원망(願望)이었던 이또 공에게 사과를 토로한 지금 홍대(鴻大)한 성은에 감읍하면서..... 은수(恩讐)를 초월한 자식끼리 서로 손을 잡고 과거를 청산, 국가를 위한 봉사를 맹세했다”라고 이 에피소드를 절묘하게 선전자료로 이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고 상해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는 격분하여 사살명령까지 내렸으나 실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차남 안준생은 안중근 의사의 적통을 이어 받지 못하고 숨어 살게 되었고,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인 청계(淸溪) 안정근(安定根)(양정의숙 2회 중퇴)의 후손이 적통을 이어 받게 되었다.
지난 7-8월에 국립극장에서는 송일국 주연의 <나는 너다>라는 연극을 상영하였다. 영웅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던 안중근과 ‘사람’이기 이전에 매국노가 되어버린 아들 안준생의 엇갈린 인생을 파헤친 연극이었다. 지금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영웅>이 공연되고 있다. 장충단은 단순한 유원지나 공원, 놀이터가 아닌 성스러운 장소로서 어떠한 형태로든 민족정신을 기리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보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이 더 불행하다’는 창강 김택영의 말대로 역사를 보존하고 아끼는 마음은 우리 사회 모두에게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양정인들은 더욱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