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에 뒤를 이어 등장한 순헌황귀비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고종황제를 모시면서 정국의 실세로 자리 잡았다. 순헌황귀비의 친정조카인 춘정 엄주익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902년 7월에는 한성부 판윤(지금의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당시에는 행정부와 사법부가 분리되지 않아 한성부 판윤이 한성재판소 수반판사를 겸임하였다. 그 당시 한성감옥에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을 지낸 우남 이승만 박사가 투옥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의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출생하여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명석한 두뇌와 집중력을 가지고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과거시험에는 번번히 낙방하였다. 과거시험제도가 폐지되자 이승만은 1895년, 스무 살 나이에 “영어를 배워 출세하겠다”는 생각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을 통하여 배일사상을 키워나갔고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의 강연을 듣고 서양문명에 눈을 떴다. 이승만은 황실정부의 무능함과 절대군주제 아래서 신음하는 동포들을 위해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는 혁명적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배재학당 안에서 시작된 협성회나 독립협회 같은 조직에 적극 참여하여 정치감각을 익혀나갔다. 이승만은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 최초의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연사로 선정되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이승만의 유창한 영어 연설은 졸업식에 참석한 수많은 청중뿐 아니라 외국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양홍묵과 함께 주간지『협성회회보』를 창간하였고, 그 후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창간하는 등 민중계몽운동을 선도하였다. 그 당시 황실은 러시아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 황실에 대해 영향력이 막강해진 러시아는 1898년 3월 10일 부산의 절영도 조차를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부산 절영도 조차요구에 반대하기 위해 모인 만민공동회 가두연설에서 가장 인기있는 웅변가로 부각되었다. 1898년 8월부터 독립협회는 인민참정권운동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독립협회 지도부는 개혁지향적인 박정양·민영환 내각의 협조로 10월 29일에 관민공동회를 개최하고 고종 황제로부터 수구파 대신 7인을 퇴진시킬 것과 독립협회측이 제시한 '현의6조'를 실천하겠다는 언질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수구파 관료들은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이유로 이상재를 위시한 독립협회 간부 17인을 체포·구금하고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이때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들과 민중을 규합· 동원하여 경무청과 평리원 건물 앞에서 연일 철야농성을 벌이며 체포된 지도자 17인의 석방과 고종이 약속한 개혁의 실천을 요구하였다. 이 농성으로 인하여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석방되었고 이는 농성(데모)이라는 근대적 민중동원수단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최초의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대중의 힘을 업고 기세가 등등해진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의 자문기관이면서 입법기능을 갖춘 중추원의 몫을 요구하였다. 50명의 중추원 의관 중 이승만을 포함한 17명이 민간인측 의관으로 구성되었다. 첫 회의에서 이승만 등은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관직을 맡기자고 제안하였다. 그 당시 박영효 등 개화파는 황제에게 역적이었다. 이일로 인하여 고종황제는 격분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체시켰고, 이승만 등은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세우기 위한 역적모의를 했다는 혐의로 1899년 1월 중추원직을 박탈당하고 체포되었다. 감옥서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승만에게 혁명동지들은 면회장에서 권총을 건네주며 탈출을 권유하였다. 이승만은 다른 2명과 함께 간수를 위협하며 감옥을 빠져 나갔다. 한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여 만주로 도주했지만, 이승만과 다른 한명은 체포되었다. 체포된 한명은 사형이 집행되었고 이승만은 미국 공사 알렌(H. N. Allen)을 비롯한 외국 선교사들의 끈질긴 구명 운동 때문에 종신형을 받아 감옥서에 구금되어 있었다. 이승만의 반(反)봉건적 사상은 감옥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서적을 시작으로 각종 서적을 반입하여 실력을 배양하였다. 정신적으로는 무장해 나가고 있었지만 행동만은 순화되었다. 감옥서 서장은 모범죄수로서 행동하면서 다른 죄수들을 가르치며 일깨워 주고 있는 이승만에게 각종 편의와 집필활동을 허가해 주었다. 이승만은 감옥서 내에서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제국신문에 정기적으로 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02년 9월 2일자 제국신문에 기사를 통하여 엄주익 한성판윤과 김영선 감옥서장에 대한 이승만의 시각을 살펴 볼 수가 있어 소개한다.
죄수특은(罪囚特恩)
자고로 나라에 형틀을 쓰는 본의가 백성을 교화하여 이후에는 형벌을 쓰지 않도록 하자함이라. 다만 옥속에 가두고 고초중에 버려두면 스스로 회개할 줄로 아는 법관이 많으니 가르치며 감화시키는 것은 알지 못하는 연고라.
자식이 여럿이면 자연 효자도 있고 혹 불효도 없지 않을 터이니 불효한 자식을 때려서 내치며 정의(情意)을 두지 않을진대 친자식도 배심(背心)이 생겨 천륜지정이 스스로 섞여지느니 이는 인정의 자연함이라. 만일 한편으로 엄하게 때려 벌하고 한편으로 은의(恩義)로 감동하여 간절히 가르칠진대 아무리 악한 자식도 목석이 아니면 스스로 화하여 부모의 엄하심도 알고 부모의 은혜도 감격히 여겨 천량지심이 자연히 발하나니 사람 개과시키기는 법에 벌도 없을 수 없고 은혜도 없을 수 없고 가르침도 없을 수 없는지라. 마음 개과하기가 각자 자기에게 달렷다 하려니와 또한 위에 있어 개과시키는 자에게로 달렸다 하겠도다.
연래로 감옥소에 재주(在住)하여 윳칠 년 중역(重役)도 하며 오륙년 미결로도 지내며 그중에 혹 원통하게 누명을 쓴 자도 있고 혹 애매하다는 자도 있으나 통히 합하여 말하면 대소간에 죄지은 백성이라 남의 죄를 생각하면 미워하고자 하는 마음은 예사사람이 항상 나는 바라.
그러므로 법관들의 말을 들으면 죄지은 놈들은 인정둘 것 없고 다 죽여야 마땅하다는 자 또한 적지 아니하니, 이는 실상 법률의 본의도 모르고 대황제폐하의 지극하신 성은을 모름이라.
법률의 본이는 이상에 대개 말하였거니와 인선하신 성의를 말씀할진대 관식(官食: 옥의 죄수에게 관에서 내리시는 음식)과 청의를 절차대로 예산지출하는 외에 국가의 경절이면 백반으로 주린 간장을 적시게 하고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에는 베옷과 솜옷을 특별히 반사(頒賜: 임금이 물건을 나누어 줌)하시는 외에 사전(賜田: 임금이 내려준 밭)을 내리사 중수(重囚: 죄가 무거운 죄수)를 불쌍히 여기매 그 사전이 비록 실시되기 어려워 모르는 백성은 혹 예칙(例勅: 정례적으로 행하는 훈시)이라고 하나 실상인즉 법관이 혹 협사(挾詐: 속으로 간사한 생각을 품음)하여 은택이 드러나게 할 수 없게 한 연고로 성의는 실로 그렇지 않으신 고로 죄수의 정형을 생각하면 옥체가 없는 듯 하다 하신 조칙이 여러번 반포된지라.
금년 만수성절에 관민이 일체로 동락하는 경일을 당하여 고기와 쌀을 내리시어 죄수들이 일제히 배부르게 하시고 특별히 칙교를 내리시어 한성판윤 엄주익 씨로 하여금 감옥소에 가서 돈을 반하하게 하시매 당일 황혼에 비가 내리는지라, 엄판윤이 봉명(奉命: 임금의 명을 받듬)하고 비를 맞으며 옥에 나아가 이미결노소 관동을 물론하고 사백십삼 명 모두에게 사원씩 주며 일러 말하기를 황태자 전하와 순비마마께서 성의를 받들어 죄수에 궁칙한 죄형을 알외사 전대(前代)에 없는 은혜를 내리심이니 죄를 회개하고 양민들이 되라하니, 죄수에 뉘아니 감격하지 않으리오. 종야(終夜)토록 만세 부르는 소리 옥중이 소요히 지내었고 병수(病囚)는 약도 지어먹고, 주린 자는 음식 사먹으며 벗은 자는 의복을 마련하고, 구중에 혹은 헐 벗고도 서책을 사서 공부하는 자도 있는지라. 이 돈으로 죽을 목숨이 사는 자 많으니 금수같은 인생인들 어찌 감은하지 않으리오.
이틑날에 다시 엄판윤이 감옥소에 와서 위에서 내리신 백하젓(쌀새우) 아홉독을 각 간에 나누어 주고 각간 정형을 살핀 후 특별히 상주하여 장차 근 사전이 내리신다 하니, 이 어찌 불효자식을 더욱 사랑하여 은혜로 감동시키는 부모의 은혜가 아니리오. 아닌게 아니라 성상의 은혜이시나 궁칙한 정형을 통촉되시지 못하시면 어찌 이러하시리오. 판윤 엄주익씨와 서장 김영선씨의 받들어 아뢰임이 다만 죄수들에게만 다행일 뿐 아니라 일변 널리 성은이 들어가게 한 공효가 또한 적지않다 할지라.
바라건대 이렇듯 감동이 여기는 뜻이 죄수들의 심중에 있을 때에 아무쪼록 자세히 상달하여 참 개과한 죄수들 택하여 많이 방송(법으로 구속했던 이를 풀어 자유롭게 함)할진대 다만 귀화한 양민이 여럿이 생길 뿐 아니라, 좁은 옥에 죄수가 많아 옥이 찼다는 청문이 없을 것이오. 금년 칭경연회에 외국 사신이 오면 옥정을 유람할 지니 외모에 수치는 우선 면할지라. 어진 관원이 옳게 말하면 성은이 더욱 크실 줄 믿는 바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