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능력이나 재산을 다른 사람이나 사회를 위하여 기부한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다. 세개의 빨간 열매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사랑의 열매”처럼 나와 내 가족, 내 이웃을 위해 재산을 나누고, 재능을 나눈다는 것은 행복을 나눈다는 아름다운 일로서 사회구성원 모두를 기쁘게 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양정의숙의 여러 자료를 조사하다가 전라남도 진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 지방유지의 선행소식을 알게 되었다. 1936년 당시 동아일보와 매일신보는 한승이씨의 기부행위를 크게 보도하였고, 동아일보에서는 사설을 통하여 한승이씨의 기부행위가 내포하는 의미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보도하였다. 양정의숙의 다른 자료를 정리하다가 기부문화를 선도한 한승이씨가 바로 양정의숙 졸업생인 것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이 글을 써서 양정동문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옥초(玉樵) 한승이(韓承履)씨는 본관이 청주 한(韓)씨로서 아버님 한용민(韓用珉)씨와 어머님 장성동(張星東)님의 차남으로 1876년 전라남도 진도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당시 진도는 육지와 떨어진 외딴 섬지방이었던 만큼 집안에서 한학을 배우며 사숙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외딴섬 진도에 구한말 지식인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진도에는 1896년부터 정만조(鄭萬朝)가 유배되어 있었고, 1900부터는 강영화(姜英華).강인필(姜仁弼)이 유배되어 진도의 지식인들과 교우를 맺고 있었다. 근대교육을 위한 학교시설이 전혀 없던 진도땅에 신식학교가 개교한 것은 1904년의 일이었으며 이를 주도한 인물은 안국선(安國善)이었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 가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동경전문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안국선은 1899년 7월 졸업 후 귀국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학자인 안국선은 같은 해 11월 박영효와 관련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904년 3월 종신형을 선고받고 진도로 유배된 안국선은 현지 지식인들과 교분을 나누며 계몽활동을 하였으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안국선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신식학교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여 진도읍 동외리 양사재(養士齋)에 광신학교(廣信學校, 진도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이 곳 마을에 거주하던 한승이씨는 자연스럽게 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옥초(玉樵) 한승이(韓承履)씨를 비롯하여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씨 등 진도의 학생들은 개화기 최고의 지식인들로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한승이씨의 광신학교 졸업연도나 졸업 후 행적은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08년 5월 대한협회의 권동진(權東鎭)씨가 서도(西道) 각 지부를 시찰한 보고서에 의하면 한승이씨는 당시 대한협회 군산지부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대한협회회보 제2호).
지방유지 한승이씨가 양정의숙에 입학하게 된 것은 안국선의 영향이 컷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국선은 1907년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양정의숙, 돈명의숙(敦明義塾)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정치와 경제를 강의하면서 <외교통의>, <정치원론>, <연설법망>, <금수회의록>을 집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한승이씨가 양정의숙에 입학한 후 학창생활이나 사회활동 등에 대한 자료는 아직 찾아내지 못하였다. 당시 한양에서는 이기(李沂), 백인기(百寅基) 등을 위시한 전라남북도 출신 인사들이 호남학회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학보간행,계몽강연,토론회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법학강습소, 측량학교를 설치하여 직접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 호남의 각 지역에 사립학교 진흥을 꾀하는 한편 한양에 유학 중인 호남 출신 학생을 후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한승이씨는 호남학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양정의숙을 졸업한 후 호남측량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한승이씨의 남을 위한 선행(善行)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독립협회에 찬성금을 기부하고(대조선독립협회보 제3호), 임피군(臨陂郡) 보흥학교(普興學校)에도 찬성금을 기부하는 등 독지가로서의 행적이 곳곳이 나타나고 있다.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한승이씨의 선행은 일회성의 자선행위를 벗어나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사회복지활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의탁할 곳이 없는 빈민 60여명을 위하여 자신의 동네에 20여동의 가옥을 건립하여 무상대여 하는 등 한승이씨의 따뜻한 마음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맥을 끊고 민족정신을 압살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실체가 없는 신화로 격하시키고 전국에 건립되었던 단군전(檀君殿)을 모두 폐지시켰다. 그러나 뜻있는 지사들은 극비리에 단군의 영정을 한양, 평양, 충남에 보존하면서 단군전의 재건립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진도에서는 1922년 1월 15일 100여명의 유림들이 단군과 기자(箕子)를 모시는 단기사(檀箕祠)건립을 위한 기성회가 발족되었다. 한승이씨는 건립기성회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불허와 감시로 단군 위패는 모시지 못하고 이듬해 2월 부득이 기자의 신위만 모시는 기성사(箕星祠)를 완공하였다. 1933년에는 향현사 복원에도 큰 힘을 보탰다.
한승이씨는 1936년 3월 10일 자신의 회갑을 맞이하여 많은 금품을 사회 각 방면에 기증하였다. 자신의 회갑연회비를 절약하여 경로회를 포함 17개 단체에 각각 일금 천원씩을 기부하였고, 또 90세 이상 노년 20여명에게 이불 한 벌씩, 61세 이상 노인 700여명에게 백동수저 한 벌씩, 극빈자들에게는 보리 5석을 배급하였다. 큰 부자도 아니면서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한승이씨의 따뜻한 마음씨와 자선행위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었다. 1936. 3. 19일자 동아일보는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한승이씨의 선행을 크게 보도하였다. <진도군 진도면 상내리 한승리씨는 일즉부터 부친의 유산 약간을 자지고 내려 오든바 현재는 천여석의 추수를 하는 형편인데 씨는 연례로 자선사업에 열중하든 터오 --중략-- 금년3월 10일은 씨의 회갑일인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야 연회비등을 절약한 대신에 많은 금품을 사회 각 방면에 기증하였다는데 그 내용을 들은 즉 평소 자기 향토에 중학이 없으므로 매년 보(통학)교졸업생 200여명이 대개는 유랑이 되고 마는 것을 유감으로 느끼든 바 금번 자기의 회갑을 기회로 하야 이를 기초재산으로 하고 당지에 하루바삐 중등교육기관을 설치하여 달라하면서 자기의 소유 논70두락과 밭40두락(당군 지산면금로동 소재)을 희사하였는데 이에 당한 지방인사는 중학기성에 매우 분망하다 한다>라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한승리씨의 희사금으로 자극을 받은 지역 유지들이 재빨리 실행위원을 선정하여 <중학기성회 즉시로 조직>하였다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위원명단이 같은 날 같은 지면에 게재되었다. 이튿날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하여 한승이씨의 자선행위를 두고 <의미있는 회갑기념>이란 소제목을 달고 극찬하였다. 자녀의 교육은 매우 중요한 바 공립학교에만 의존할 수가 없고 사립교육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여 다른 지역에서는 민간인 독지가들이 학교를 설립하는데, 전라도와 같이 큰 道에서 사립중학교가 없다는 것이 의아해 하던 차에 한승이씨의 기부행위가 일파만파를 불러일으켜 진도에 중학교를 세우게 되면 매우 뜻깊은 회갑이 될 것이라 극찬하였다.
조선신사대동보의 기록에 의하면 한승이씨는 惠民院主事 中樞院議官의 관력(官歷)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진도군지에는 진도군 참사, 진도군 조합장, 전라남도 도평의원을 지냈고 1946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사회 속에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을 통하여 함께 나누는 기부문화를 이끌어 나간 한승이씨의 업적을 찾아내어 삶의 가치를 부여하고 재조명하는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 후배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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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돼지
2022-10-02 18:25
귀중한 글 잘 보았습니다. 옥초 한승이 선생은 근촌 백관수선생(1889-1961), 인촌 김성수선생(1891-1955)의 신학문의 스승이십니다.
(2022.10.2)
(202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