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큰 스승인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선생님은 구한말 1896년에 태어나 대한제국, 을사늑약, 한일병탄,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후 정부수립과 이념적 갈등, 한국전쟁, 419혁명, 516혁명 등 현대사의 굵직한 격변기를 거쳐 1989년 8월 향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희승 선생님의 회고록이라 할 수 있는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은 1996년 출간되었으나 내 자신은 최근에야 이 책을 읽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 겨레의 스승이요 지사이신 한 어른께서 고이 누워 계시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래 세상이 여러번 바뀌었으나 선생은 그 꼿꼿한 지조로 백년을 하루와 같이 겨레의 사표(師表)이셨다. 세상에 스승이 많으나 선생처럼 고결한 스승이 몇분이나 되며, 불의 부정과는 타협하지 않고 선생처럼 대쪽같이 곧은 기개로 한평생을 지내는 동안 만인(萬人)의 숭앙을 받았던 어른은 또 몇이 되리오>. 이 글은 1992년 6월 9일에 세운 선생의 추모비를 위하여 문하생인 강신항 교수가 쓰신 비문의 첫머리로서 이희승 선생님의 진면목을 함축성있게 표현하였다. 이희승 선생님은 1912년 4월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학을 전공하셨으나 1913년 양정의숙이 양정고보로 격하됨에 따라 자퇴를 하신 분이다. 1913년 당시 졸업반 학생들은 양정의숙을 제6회로 졸업하였으나, 2학년 학생들은 졸업을 할 수가 없었다. 당국에서는 대부분의 학생들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로 편입시켰으나 이에 응하지 않은 학생들은 자퇴하거나 양정고보 1학년을 다시 다니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내 자신은 이희승 선생님이 어떤 연유로 양정의숙에 입학하였는지 또 왜 보성전문학교로 편입하지 않으셨는지 궁금하던 차에 금번 이 책을 읽고서야 입학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희승 선생님은 자신의 회고록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에서 양정의숙에 입학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다.
나(일석 이희승)는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5년제)에 입학하였으나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인하여 외국어학교가 폐교되자 3학년으로 조기졸업한 후 곧바로 관립 한성고등학교의 후신인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2학년에 편입하였다. 본교생들은 갑반(甲班), 외국어학교 일어부를 나와 일본어를 아는 편입생들은 을반(乙班), 일본어를 모르는 편입생들은 모두 병반(丙班)에 배치되었다. 나를 포함하여 영어, 덕어(德語, 독일어), 법어(法語, 프랑스어), 한어(漢語, 중국어)를 전공한 병반 편입생들은 편입 초부터 교사들에게는 물론 본교생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다. 왜색이 짙은 학교분위기와 병반 편입생이라는 집단 따돌림으로 인하여 1911년 9월 3학년 1학기가 끝나기 무섭게 병반 학생 6,7명이 집단사퇴를 하고 말았다. 나도 물론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니꼬워서 공부 못하겠다”고 학교를 뛰쳐나오고 나니 막상 옮아갈 학교도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함께 자퇴한 친구 하나가 소설 대본(貸本)집을 차려 이 집에서 소설책을 빌려다 하루에도 몇권씩 읽어 제쳤다. 이인직(李人稙), 최찬식(崔瓚植), 이해조(李海朝) 등 그 무렵에 발표되기 시작한 신소설은 물론 고대소설을 차례로 섭렵했다. 소설을 읽는 것은 심심파적은 됐지만 그것으로 업을 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겨울동안 권태와 불만과 울분에 싸여 빈둥대던 나(일석 이희승)는 다시 학교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뜻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러면 서봉훈(徐鳳勳) 선생이 있는 양정의숙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17세 되던 해 봄에 양정의숙 법률과에 입학했다. 양정은 엄(귀)비의 투자로 1905년 도렴방(都染坊. 현 세종문화회관 뒷자리)에 세워졌는데 당시에는 법률학과와 경제학과가 있는 전문학교였다. 사각모를 쓰고 학교에 다니는 기분은 괜찮았다. 딱딱한 법률 과목들이 취향에 맞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재미를 붙일만 했다. 그러나 1년도 채 못 된 1913년 10월 양정의숙은 조선교육령이라는 총독부 정책으로 고보(高普)로 격하 개편되었고, 나 역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전문학교에 다니던 처지에 고보1학년으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후략-